이 직업이 궁금하다

[연구소 소장] 마음 속 등대, 멘토를 만들어라. 거친 세상 순조롭게 헤쳐나갈 수 있게… [스펙 뛰어넘기] 조회수 : 3150

유담 최효찬은?
1964년 경남 합천 출생
1989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90년 경향신문 입사
1996년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사(신문학)
2006년 경향신문 퇴사
2006년 연세대 대학원 박사(비교 문학)
현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 소장, 저술가, 강사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문연구원
홈페이지 : www.choi1.com

저서
테러리즘과 미디어(커뮤니케이션북스, 1998)
메모의 기술 Ⅱ(해바라기, 2004)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예담, 2005)
한국의 1인 주식회사(한국경제신문사, 2007)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위즈덤하우스, 2008)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예담, 2008)
세계 명문가의 독서교육(바다, 2010)
세계 명문가의 공부습관(스콜라, 2011)
안철수의 착한 성공(비전코리아, 2011)
잠자기 전 30분 독서(위즈덤하우스, 2011)
하이퍼리얼 쇼크(위즈덤하우스, 2011)
등 총 17권



인터뷰가 있었던 날은 수은주가 영점 아래로 뚝 떨어진 동짓날이었다. 몸이 오슬오슬 떨릴 정도의 추운 날씨 속에서 이뤄진 야외 사진 촬영. 최효찬 소장은 그 시간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때론 “카메라만 들이대면 내 표정이 스스로 느껴져요”라며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오래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년, 피터 위어 감독)’가 떠올랐다. 말썽꾸러기 학생들에게 언제나 웃음 띤 얼굴로 바른 길을 제시하는 ‘멘토’였던 존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 외모나 스타일이 닮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인터뷰 내내 느낀 인상이다.

그는 스스로를 ‘멘토’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고 앞으로의 이 세상을 꾸려나갈 젊은이들에게 “멘토를 가져라”라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기자는 그가 젊은이들의 멘토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느꼈다. 17년의 기자 생활을 통해 세상 구석구석을 보고 느꼈다는 점, 1998년 이래 17권의 양서를 쓴 저술가라는 점, 그리고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 때문이다.


최효찬 소장을 인터뷰하기 전, 기자는 약간의 부담감에 짓눌렸다. 최 소장은 (지금은 떠나 있지만) 17년간 언론계에 몸담았던, 내게는 ‘대선배’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던 긴장 때문이었을까. 그는 긴장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건넸고 인사를 나눴다. 받아든 명함의 이름 세 글자 앞에는 ‘유담’이라는 호가 붙어 있었다.

“아름다울 유(瑜)에 못 담(潭). 아름다움을 담는 연못이라는 뜻이죠. 사주에 화(火)가 많다고 해요. 이름에서 그 화를 눌러주는 것이 필요한데, 개명하기 힘드니까 호를 통해서 화를 누르려고 한 거죠. 작명소에서 거액을 들여 지었습니다. 하하.”

이어 역사 속에서 한 인물을 끄집어냈다.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호를 100개 정도 썼다고 해요. 그 당시에는 ‘다산’보다 ‘여유당’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정약용 선생의 저술을 총정리한 ‘여유당 전서’도 그 호에서 나온 것이죠.”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에게 ‘저술에서의 멘토’다. 그는 전남 강진군에 있는 ‘다산 초당’에서 직접 찍은 사진을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정약용 선생은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어요. 그걸 보고 정약용 선생의 10분의 1만이라도 쓰자고 생각했죠. 제 목표는 죽기 전까지 50권의 저서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가 보내는 이메일 말미에 ‘다산은 500, 나는 50!’이라는 글귀가 달려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 소장은 현재까지 자녀교육, 미디어 등 분야에서 17권의 책을 썼고,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가 선정한 ‘한국의 저자 300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첫 번째 멘토 ‘아버지’

최 소장은 1964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까지 합천에서 생활했고 고등학교는 옆 동네 진주에서 다녔다.

“시골 산동네였죠.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동막골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전쟁 와중에도 그 고을만은 이상향같이 평화로운 곳, 세상사와 동떨어진 것 같은 곳이 합천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마음 한쪽에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왜 이런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걸까’라는 주위 환경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유소년기의 기억들이 참 아름다운 추억인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그 당시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을 감추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했지만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멘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시골 사람들은 꾸준히 내려오는 전통은 잘 간직하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통찰은 부족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급변하는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기 힘들죠. 아이들이 그 영향을 받다 보니 벗어나기 힘들어진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다른 농군들에 비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이미 70년대에 하우스 기법을 도입해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없었던 토마토를 재배하고 과수원을 만들어 복숭아도 키웠다. 바쁜 와중에도 자녀교육에 힘써 학교 육성회장을 맡기도 했다.

“형편이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아버님의 그런 계몽적인 생각 덕분에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도시에서야 제 나이 또래에도 대학 나온 사람이 수두룩하지만 시골 출신 중에는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아버님 덕분에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멘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당시에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공고에 많이 갔어요. 졸업 후 취직이 수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죠. 공부를 잘한다고 하면 무조건 공고에 가라고 부추겼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공고에 갔었다면 지금과는 삶이 많이 바뀌어 있을 거예요. 꿈을 이루는 것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인 진주 동명고에 진학했다. 성적이 어느 정도였냐고 묻는 질문에 조금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전교 1, 2등 했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외교관의 꿈’을 품은 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와 보니 사회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시위에 학내에는 매일같이 전경차가 들어왔다. 그도 시위에 참가하면서 사회에 눈을 떴다.

“회의감이 들었어요. 군사정권 아래에서 외교관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했죠. 그때는 군사정권이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게 보였어요. 그렇게 외교관의 꿈을 접었습니다.”

졸업 무렵 그가 선택한 길은 기자였다. 당초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했지만 친했던 조교가 ‘경제적 압박이 심할뿐더러 비전도 그리 높지 않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매일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자신의 적성과 맞을 것 같았다. 그가 입사한 곳은 ‘동양경제신문’. 현재는 폐간되고 사라진 곳이다.

“그곳에서 8개월 정도 일했습니다. 1기로 입사했는데 그 해에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었죠. 그러자 사주가 시끄러운 게 싫었는지 신문을 폐간시켜 버렸어요. 언론 정신 하나 없는 사주였던 거죠. 그 후 경향신문에 입사해 16년 2개월 동안 근무했습니다.”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취재를 물어봤다. 오랫동안 근무했던 ‘경제부’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 4년 동안 몸담았던 ‘매거진X’에서의 취재 이야기를 꺼냈다.

“제주도에 살던 한 택시 기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장애인 여성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예요.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을 닫고 있던 그녀에게 편지로 3년 동안 꾸준히 구애해 결국 결혼을 한 러브스토리입니다. 경제부 기자로 있으면서 썼던 ‘세무 조사’나 ‘산업 동향’ 관련한 것보다 이런 취재가 훨씬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습니다.”

혹 그 기사를 다시 읽어볼 수 있을까 싶어 인터뷰가 끝난 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찾아낸 그 기사의 제목은 ‘장애인 아내가 남편에게 보내는 사부곡’. 이 지면에 바로 옮길 수 없는 것이 내심 아쉽다.



‘카르페 디엠’ 현재에 충실하라

기자로 자리를 잡았지만 매일같이 이어지는 술자리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본받을 만한 ‘멘토’가 없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리고 2006년 4월, 오랫동안 몸담았던 경향신문을 그만두기로 했다. 새로운 인생 2막을 열기 위해서였다.

“인생의 첫 목표가 세상의 이곳저곳을 보고 다니는 신문기자였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취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기자에게는 시기적으로 ‘취재를 할 수 없는’ 단계가 옵니다. 수석차장쯤 돼서 ‘데스크’에 앉을 때죠. 물론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저와는 맞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일선에서 취재할 수 있을 때까지만 기자 생활을 하자’고 생각했다. 이후의 삶에 대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스스로 기회를 만들었다.

“일단 저술지원금을 지원해주는 재단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여기서 기획하는 능력을 키웠죠. 다행히 통과됐고 첫 번째 책인 ‘테러리즘과 미디어’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터뷰 시작 때 기자에게 선물한 책 ‘안철수의 착한 성공’을 가리켰다.

“안철수 씨가 계속해서 변신가능했던 이유를 ‘스스로에게 짐을 지우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어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새로운 일을 부여했고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기 확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가 변신을 하는 과정에서 택했던 방식도 안철수의 그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저술가로서의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 낸 책이 몇 백만 권 팔렸다고 해도 다음 작품에서 또 한 번 그 같은 결과를 내긴 힘들어요.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으로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너무 급하게 뭔가를 이루려고 하다 보면 지쳐 쓰러져버려요. ‘번아웃(burn-out)’이라고 하는 소진 상태가 오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 20대들이 ‘단계’를 너무 생략하려 하는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을 했다.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려고 하는 욕심에 대한 질타다. 그는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순간 그의 좌우명이 무엇인지 궁금해 물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라틴어로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이죠.” 그러고 보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외친 말도 이것이었다.



주변에 없다면 책 속에서 멘토를 찾아라

그는 젊은이들에게 “위장하지 말라”는 의미심장한 충고를 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에게서 물질적인 부분이 만족되지 않으면 굉장히 불안해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젊은 시기에 가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데 그걸 견디지 못하는 거죠. 무리해서 명품 백을 사보지만 위장일 뿐입니다. 신상품이 나오면 또 결핍 상태가 되고 또 위장하려 하죠. 그 과정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가 최근 펴낸 책 ‘하이퍼리얼 쇼크’의 내용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현대 물질문명의 끝없는 유혹 속에서 ‘유혹당하지 않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는 또 “자기 주변에 있는 활용 가능한 멘토를 자주 만나라”는 조언을 했다. 하지만 자기 주변에서 ‘이분이야말로 내 인생의 멘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방법을 물었다.

“책에서 훨씬 좋은 멘토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최효찬의 멘토는 총 14명. 아들에게 613통, 손자에게 150통의 편지를 쓴 자녀교육의 달인 ‘퇴계 이황’을 비롯, 평생 일기쓰기를 실천한 ‘레오 톨스토이’, 정치·경제·철학 등을 종횡무진하며 비평한 ‘슬라보예 지젝’ 등이다.

“등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밤바다를 넓게 비출 수 있죠. 멘토 역시 분야별로 많이 둘수록 삶을 넓게 볼 수 있습니다. 살아나가는 데 쓸쓸하지 않게 됨은 덤이라고 할 수 있죠. 책과의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조언을 받으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인터뷰 말미, 예의 마지막 질문 “행복하세요?”를 던지자 미소를 띠었다.

“행복이라고 하기보다는 충만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제 분신 같은 책들이 계속 생산되고 있고,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아요. 신문기자 최효찬보다 저술가 최효찬이 훨씬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효찬이 말하는 ‘달필’ 되는 법

평생을 글과 함께 살아온 최효찬 소장에게 글 잘 쓰는 방법을 물었다. 그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은 ‘초서(抄書)’. 초서란 책의 내용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 혹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글귀를 뽑아 따로 적어두는 것이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지만 그만큼 배울 수 있는 것도 많다는 전언이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지식을 축적할 수 있음은 물론 문체 역시 자연스레 습득할 수 있다”며 “여러 글을 초서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젊은 세대가 읽으면 좋은 최효찬의 책들

한국의 메모 달인들(위즈덤하우스, 2010)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된 전문인들의 메모 비법을 소개한 책. 메모의 기술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메모 습관을 자신의 사업이나 업무에 적용해 효과를 본 사람들의 실제 활용법을 담고 있다.

하이퍼리얼 쇼크(위즈덤하우스, 2011)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소비사회의 메커니즘을 11개의 사례를 통해 설명한 책. 자본에 유혹당하지 않고 삶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사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담고 있다.

잠자기 전 30분 독서(위즈덤하우스, 2011)

잠자기 전 30분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일 뿐 아니라 다음날의 기분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간이다. 최 소장은 이때 분야별 명저를 읽음으로써 다음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최 소장의 아내가 그의 저서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는 후문.

글 양충모 기자 gaddjun@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나의 생각 Good B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