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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 시험 코앞’ 노량진 르포…“모의고사 문제지 ‘보물’ 대접, 가슴 졸이며 생수만 벌컥” 조회수 : 6214

4월 8일 9급 공무원 공채 필기시험

긴장감 흐르는 강의실엔 연필 소리만

모의고사 특수로 제본소 북적

친구끼리 나눠 수강한 뒤 문제지 모아 제본

좋아하는 일은 사치, 많이 뽑는 직군이 최고


대한민국에서 직장인이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취준생이 되거나 공시생이 되거나. 


무엇을 택하든 시험을 치러야 한다. 취준생은 토익과 인적성검사, 요즘은 면접도 PT면접이라 해 문제를 주고 풀이과정을 설명하는 문제풀이식이다. 후자는 더하다. 지금 공시생들에게 인생의 전부는 오직 시험이다. 시험 답안이 진리이고 그를 ‘직장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연 2회 중 하나인 대기업 공채시즌이 한창인 3월, 취준생 만큼 공시생들 역시 당장 다음 달에 있을 국가직 9급 시험 등으로 분주했다. 전국 공시생이 한데 모인 곳, 그래서 하루 24시간이 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노량진의 봄을 만나봤다.



노량진은 지하철 개찰구부터 남달랐다. 각 기기마다 학원 강사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월 생활비 160만원… ‘경기 불황’에 방 빼는 수험생 많아


노량진은 내게도 익숙한 곳이다. 7년 전, 이곳에서 교원임용시험 이른바 ‘임고’ 모의고사 반 수업을 들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거의 직장인급 스케줄이었는데, 수중의 돈은 직장인만큼 못 되니 점심시간이면 500원짜리 빵 두 개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깜깜해져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왜 노량진에서는 63빌딩이 그렇게 가깝고 크게 보이는지. 지하철 안에서 빛이 번쩍이는 여의도의 빌딩들을 바라보며 늘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7년 뒤 다시 찾은 노량진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9호선 개통과 함께 출구가 여럿 추가됐고 상징과도 같았던 육교는 보이지 않았다. 한창 시끌시끌했던 컵밥 거리 역시 새로 생긴 ‘컵밥 거리’ 안으로 흡수돼 있었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만나는 수험생들의 모습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숄더백이나 파우치는 이들에겐 사치였다. 두꺼운 책과 간식만 들어도 손이 모자라니 대개는 가볍고 단단한 배낭을 등에 들쳐 메고 다녔다.




노량진역 3번 출구 부근 학원가를 지나 맥도날드에서 우회전을 하면 바로 나오는 골목입구. 

이곳에서부터 수험생을 위한 먹거리나 놀거리 등 상점이 이어진다.


노량진이 고시촌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약 40년 전이다. 1970년 말, 정부가 강북지역 인구밀집 해소를 위해 종로에 있던 입시학원을 4대문 밖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이들 학원이 노량진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게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즘은 원룸 체감 거래량은 많이 줄고 있다고 한다. 경기 불황으로 부모들이 자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라는 것. 노량진 고시촌 입구에서 만난 한 부동산 중개업소 대표 A씨는 “수험생들이 보통 월세와 학원비, 생활비를 통틀어 월 160만원 가량을 쓴다”며 “요새 경기가 안 좋다 보니 부모들이 부담을 느끼고 재계약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250원짜리 노래방’ ‘인강 위한 에그 구비’… 모든 게 수험생 중심


반면 노량진은 재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 끼 2000원대 한식뷔페, 곡당 250원짜리 동전노래방 등 온전히 수험생의 주머니 사정에 맞춘 상가들이 많다. 특히 제대로 된 한식을 챙겨먹기 어려운 수험생을 위해 수십 첩의 한식뷔페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한 끼는 5000~6000원으로 특별히 저렴하진 않지만 월 단위 정기권을 구매하면 2000~3000원대로 가격이 떨어진다.


인근 슈퍼마켓 역시 물가가 과거에 멈춰있다. 500원짜리 치약, 200원짜리 생수 등 주로 생필품을 중심으로 비용이 저렴하게 책정돼 있다. 오죽하면 슈퍼 곳곳에 붙은 ‘물량부족’ ‘재입고’라는 붉은 글씨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대량구매, 직수입 등을 통해 판매가를 낮췄다는 게 이들 슈퍼의 설명이다.  





뷰티에도 노량진 트렌드가 존재했다. 근처 대형 화장품숍 직원은 “색조보다는 핸드크림이나 립밤이 압도적으로 많이 팔린다”고 말했다. 통신사 역시 마찬가지. 한 통신사 직원은 “90% 이상이 수험생 고객인데 대부분 휴대폰 기종은 개의치 않고 무조건 ‘저렴한 것’을 찾는다”며 “야외 와이파이 지원기기인 에그도 인기품목이다. 밖에서 인터넷강의를 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노량진에서는 옛날 브랜드도 많이 만날 수 있다. 고정 수요층이 워낙 견고해 변화가 다른 지역에 비해 더디다. “어쩌다 독특한 브랜드가 들어서면 학생들로 줄이 길게 늘어 선다”고 인근 상인은 말했다. 마침 근처 한 유명 핫도그 가게가 수험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노량진에는 수험서 할인, 공무원 합격자 대출, 인터넷 강의 맞춤 제품 등 

수험생 중심 마케팅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9급 시험 ‘3주 앞, 지원자 수 역대 최대


하지만 노량진의 핵심 상가는 누가 뭐래도 학원이다. 이들 학원은 지하철역 입구부터 시작해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대로변을 한가득 차지하고 있다. 주로 대형학원들이 시험 종류별로 1관, 2관 등 여러 빌딩을 동시에 보유해 운영하고 있다.


빌딩은 거의 1층 입구부터 전 층이 자습실과 강의실 등 공부를 위한 공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특히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과 9급 사회복지, 지방 소방공무원 등 주요 시험이 약 3주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학원 안에서는 안내 데스크의 상담 소리, 강사의 강의 소리 외에는 책에 얼굴을 파묻고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 수 백 명의 연필소리만 들렸다.





예민해져있기 때문일까. 학생 인터뷰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기자라는 말만 듣고 ‘아니다’라며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두 손으로 엑스자를 그리며 확실히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 힘든 이야기를 기사에 잘 실어 달라”고 밝게 말하는 수험생도 있었다. 


그 때, 약 300석 규모의 대형 강의실이 쉬는 시간을 맞아 활짝 열렸다. 순간 안에 있던 뜨거운 공기도 함께 빠져 나왔다. 학생들 역시 답답했는지 나오자마자 시원한 복도에서 큰 숨을 들이키거나 정수기에서 차가운 생수를 따라 벌컥벌컥 마셔댔다. 두 명 남짓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 앞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9급 공무원 행정직 시험을 준비한다는 수험생 한모씨(28)는 “이제 시험이 정말 코앞에 닥쳐 다들 말도 없이 공부만 하고 있다”며 “원래 시끌벅적하고 밝은 성격이었는데 시험을 준비하면서 말수도 줄고 자신감도 잃어 부모님이 속상해 하신다”고 말했다.


시험이 직전에 이르면 인근 인쇄소도 분주해진다. 수험생들이 실전 경험을 위해 모의고사 풀이에 집중하는 시기인데 비용을 아끼기 위해 시험지를 여럿이 복사해 나눠보기 때문이다. 


9급 준비생 전모(25) 씨는 시험이 가까워올수록 문제를 많이 풀어야 되기 때문에 모의고사 문제지가 보물과도 같다며 친구들끼리 서로 다른 학원 모의고사반을 수강한 뒤, 한 데 모아 복사하면 저렴하게 많은 문제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씨는 또 “수험생끼리 제본한 문제지를 사고 팔기도 한다”고 했다.


바로 옆의 또 다른 학원을 찾았다. 마침 방금 모의고사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조교로 보이는 직원이 강의실 입구에 모의고사 성적 순위표를 붙이자 수업을 마치고 나온 수강생들이 일제히 모여 들었다. 혼자 생각에 빠진 수험생도, “지난번보다 성적이 떨어져 망했다”며 큰 소리로 한탄하는 수험생도 있었다.





저녁 6시,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줄을 섰다. 개중에는 잠시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나선 경우도 있었다. 학생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기계가 몇 차례나 더 왔다갔다 한 뒤에야 모든 학생들이 학원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1층 역시 저녁반 수업을 듣기 위해 온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올해 국가공무원 5·7·9급 선발 인원은 총 6023명이다. 지난해(5372명)보다 651명(12.1%) 늘어났다. 1981년 6870명을 뽑은 이후 가장 많은 규모다. 그러나 그만큼 지원자 수도 늘었다. 올해 국가공무원 9급 공채 시험에는 22만8368명이 지원해 역대 최대 규모의 접수 인원을 기록했다. 


한 공무원 학원 관계자 B씨는 “노량진은 사방에 경쟁자가 있기 때문에 수험생들이 여유를 잃어버리는 게 사실”이라며 “또 취업이 워낙 어렵다 보니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많이 뽑는 직군’에 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수강 상담을 하면 9급 국가직 시험의 경우 대부분 채용인원이 가장 많은 세무직을 희망한다는 것. 인사혁신처는 매년 1000여명 이상의 세무직 공무원을 뽑고 있다. 


B씨는 학생들도 생각을 바꿔야 겠지만,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 정도로 간절한 수험생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정부가 탄생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도희 기자 tuxi0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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